정대현 (1978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대현은 1978년생으로, 아마추어 시절과 프로 선수 시절을 거쳐 지도자로 활동한 야구인이다. 경희대학교 재학 중 1999년 인터컨티넨탈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011년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2015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에는 지도자 연수를 거쳐 동의대학교 투수코치, 2022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불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202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으로 부임하여, 같은 해 7월 1군 수석겸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언더핸드 투수로서 두뇌 피칭을 선호하며, 국가대표 마무리 투수 계보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 프로 야구 100세이브 클럽 - 송진우 (야구인)
송진우는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KBO 리그 통산 최다승, 최다 패전 기록을 보유하고 2000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 한국 프로 야구 100세이브 클럽 - 정명원
정명원은 1989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하여 현대 유니콘스에서 마무리 투수와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1994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고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며 은퇴 후에는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군산중앙초등학교 동문 - 신영대
신영대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전북대학교 총학생회장, 국회 보좌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등을 거쳐 제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22대 총선에서 재선하여 현재 전북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갑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군산중앙초등학교 동문 - 강현욱
강현욱은 경제기획원 차관, 동력자원부 차관, 농림수산부 장관,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군산중학교 동문 - 채이배
채이배는 공인회계사 출신 정치인으로, 제2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바른미래당 원내부대표, 정책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고,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 군산중학교 동문 - 양기대
양기대는 권력 비리와 부패 문제를 파헤쳐 특종을 보도하며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7회 수상한 전직 언론인이자, 광명시장을 두 번 역임하고 현재 제2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정치인이다.
| 정대현 (197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정대현 |
| 로마자 표기 | Jeong Dae-hyeon |
| 영문 표기 | Chong Tae-Hyon |
| 출생일 | 1978년 11월 10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
| 신장 | 185cm |
| 체중 | 96kg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선수 경력 | |
| 고교 | 군산상업고등학교 |
| 프로 입단 연도 | 2001년 |
| 드래프트 | 1997년 고졸우선지명 (쌍방울 레이더스) (2001년 입단) |
| 소속 구단 | SK 와이번스 (2001년 ~ 2011년) 롯데 자이언츠 (2012년 ~ 2017년) |
| 첫 출장 | KBO 리그 / 2001년 4월 7일 대전 대 한화전 |
| 마지막 경기 | KBO 리그 / 2016년 8월 7일 사직 대 두산전 구원 |
| 코치 경력 | |
| 코치 경력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연수코치 (2018년) 동의대학교 투수코치 (2018년 ~ 2023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20년 ~ 2023년)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 (2024년 시즌 중 ~) |
| 감독 경력 | |
| 감독 경력 |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24년 시즌 중) |
| 국가대표 경력 | |
| 국가대표 | 대한민국 |
| 올림픽 | 2000년 2008년 |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006년, 2009년, 2013년 |
| 프리미어 12 | 2015년 |
| 아시안 게임 | 2010년 광저우 |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07년 타이중 |
| 대륙간컵 | 1999년 호주, 2002년 쿠바 |
| 수상 | |
| 주요 성적 | 2x 한국시리즈 우승 (2007년, 2008년) |
| 메달 기록 | |
| 올림픽 | 2008 베이징 금메달 (야구 단체전) 2000 시드니 동메달 (야구 단체전) |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009 로스앤젤레스 은메달 (단체전) 2006 샌디에이고 동메달 (단체전) |
| 아시안 게임 | 2010 광저우 금메달 (야구 단체전) |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07 타이중 은메달 (단체전) |
| 프리미어 12 | 2015 일본-타이완 금메달 (단체전) |
| KBO 리그 통산 기록 (2016년 기준) | |
| 승패 | 46승 29패 |
| 세이브 | 106 |
| 평균 자책점 | 2.21 |
| 탈삼진 | 559 |
2. 선수 시절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경희대 체육대학에 진학했다. 경희대 4학년 때인 200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출전했다.[4] 9월 20일 첫 올림픽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타선의 난조로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5] 9월 26일 미국을 상대로 두 번째 선발 등판해 6.1이닝 3피안타, 2사사구, 6탈삼진, 2자책점을 기록했으나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6]
1999년 시드니에서 열린 1999 인터컨티넨탈컵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18.1이닝 동안 1승 1패, 평균자책점 1.47, 탈삼진 21개를 기록했다. 리그전 대한민국 첫 경기인 쿠바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IBAF 주최 국제 야구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쿠바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8.2이닝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24명의 선수 명단 중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미국과의 두 경기에서 모두 선발 투수로 출전하여 로이 오스왈트와 맞대결을 펼쳤다. 리그전 미국과의 첫 경기에서 6개의 안타를 허용했지만 5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7이닝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다. 준결승전에서도 미국을 상대로 6.1이닝 동안 2실점 5피안타 6탈삼진의 호투를 펼쳤다. 이 활약으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했고, 정대현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당시 계약금은 3.5억원, 연봉은 2000만원이었다.[8] 2002년 2002년 인터컨티넨탈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기여했다. 2005년 팔 부상으로 시즌 전반기를 결장했고,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2006년 호세 카브레라와 함께 와이번스의 마무리 투수 역할을 분담했다. 카브레라가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7년 와이번스의 풀타임 마무리 투수가 되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한국시리즈에서 팀의 초우승을 결정지을 때 마운드에 올랐다.
2008년 김성근 감독 부임 후 붙박이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며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여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7] 2009년 제2회 WBC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내주며 등판 기회가 적었다. 2010년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시즌 초반 결장했으나, 5월에 복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롯데 이대호를 상대로 3년 연속 무안타로 틀어막아 "'''이대호 킬러'''"로 불렸다. 2011년 시즌 후 FA 자격을 획득, MLB 진출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볼티모어 오리올스 메디컬 테스트 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고 귀국했다.[8]
SK 와이번스 시절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년도 | 평균자책점 | 경기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완투 | 완봉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
|---|---|---|---|---|---|---|---|---|---|---|---|---|---|---|---|---|
| 2001 | 5.40 | 18 | 0 | 0 | 0 | 0 | 0 | 0 | 16.2 | 19 | 2 | 11 | 20 | 10 | 10 | |
| 2002 | 3.21 | 24 | 1 | 0 | 0 | 0 | 0 | 0 | 42.0 | 37 | 2 | 11 | 30 | 15 | 15 | |
| 2003 | 2.29 | 37 | 4 | 3 | 2 | 8 | 0 | 0 | 51.0 | 33 | 4 | 20 | 34 | 16 | 13 | |
| 2004 | 2.34 | 52 | 2 | 3 | 2 | 16 | 0 | 0 | 69.1 | 62 | 2 | 19 | 50 | 22 | 18 | |
| 2005 | 0.37 | 20 | 1 | 0 | 3 | 6 | 0 | 0 | 24.1 | 10 | 0 | 6 | 18 | 1 | 1 | |
| 2006 | 1.94 | 59 | 8 | 4 | 15 | 11 | 0 | 0 | 74.1 | 55 | 3 | 26 | 52 | 19 | 16 | |
| 2007 | 0.92 | 60 | 3 | 2 | 27 | 3 | 0 | 0 | 78.1 | 50 | 3 | 32 | 65 | 12 | 8 | |
| 2008 | 2.67 | 49 | 4 | 3 | 20 | 0 | 0 | 0 | 60.2 | 51 | 4 | 25 | 50 | 18 | 18 | |
| 2009 | 1.20 | 56 | 2 | 3 | 10 | 13 | 0 | 0 | 52.2 | 40 | 1 | 21 | 43 | 11 | 7 | |
| 2010 | 1.40 | 49 | 4 | 1 | 4 | 8 | 0 | 0 | 45.0 | 31 | 1 | 8 | 47 | 7 | 7 | |
| 2011 | 1.48 | 53 | 3 | 3 | 16 | 11 | 0 | 0 | 52.2 | 43 | 1 | 28 | 39 | 12 | 9 | |
| 합계 | 1.93 | 477 | 32 | 22 | 99 | 76 | 0 | 0 | 569.0 | 431 | 24 | 207 | 448 | 143 | 122 | |
2011년 스토브 리그 때 양승호 감독이 투수진 보강을 위해 영입을 추진했고, 정대현은 MLB 진출 포기를 선언한 당일인 12월 13일 4년 총액 36억원(계약금 10억원, 연봉 5억원, 옵션 6억원)에 FA 계약을 체결하고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9] 보상 선수로는 임훈이 선택되었다. 등번호는 SK 시절의 '''21'''번이 아닌 '''38'''번이었다.
2012년 시즌 직전 무릎 부상이 재발해 수술을 받아 약 6개월간 재활했다.[10] 2012년 8월 9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적 후 첫 등판해 1이닝 동안 1탈삼진을 기록하며 복귀했다.[10] 김사율이 마무리를 맡고 있어 셋업 및 중간 계투로 보직을 변경해 좋은 모습을 보였고, 2012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주로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MVP로 뽑혔다. 그의 별명과 함께 SK 와이번스의 불펜 운용을 두고 나온 '벌떼 야구'와 양승호 감독의 성인 '양'을 결합해 '양떼 야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11]
2015년 오프 시즌인 10월 10일 제1회 WBSC 프리미어12 한국 대표팀 선수 28명에 선발되었다.[2] 이 대회에서 준결승 일본전 9회 1점 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고, 결승 미국전에도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2017년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 1. 아마추어 시절
1997년 쌍방울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경희대 체육대학에 진학했다. 경희대 4학년 때인 200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출전했다.[4] 9월 20일 첫 올림픽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타선의 난조로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5] 9월 26일 미국을 상대로 두 번째 선발 등판해 6.1이닝 3피안타, 2사사구, 6탈삼진, 2자책점을 기록했으나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6]1999년, 경희대학교 3학년이던 정대현은 시드니에서 열린 1999 인터컨티넨탈컵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인터컨티넨탈컵에서 18.1이닝 동안 1승 1패, 평균자책점 1.47, 탈삼진 21개를 기록했다. 리그전 대한민국 첫 경기인 쿠바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IBAF 주최 국제 야구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쿠바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8.2이닝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24명의 선수 명단 중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미국과의 두 경기에서 모두 선발 투수로 출전하여 로이 오스왈트와 맞대결을 펼쳤다. 리그전 미국과의 첫 경기에서 6개의 안타를 허용했지만 5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7이닝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다. 준결승전에서도 미국을 상대로 6.1이닝 동안 2실점 5피안타 6탈삼진의 호투를 펼쳤다. 그의 인상적인 활약 덕분에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했고, 정대현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2. 2. SK 와이번스 시절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당시 계약금은 3.5억원, 연봉은 2000만원이었다.[8] 데뷔 시즌에는 18경기에 등판하여 16⅔이닝 동안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평범한 신인 시즌을 보냈다.2002년에는 24경기에 등판하여 42이닝을 소화하며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전년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2002년 인터컨티넨탈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기여하였다.
2003년에는 37경기에 등판해 4승 3패, 8홀드, 2세이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4년에는 52경기에 등판해 2승 3패, 16홀드, 2세이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6홀드는 그의 커리어 최고 기록이다.
2005년에는 팔 부상으로 시즌 전반기를 결장했고,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시즌 후반기에 복귀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2006년에는 호세 카브레라와 함께 와이번스의 마무리 투수 역할을 분담했다.
카브레라가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7년에는 와이번스의 풀타임 마무리 투수가 되어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한국시리즈에서 팀이 초우승을 결정지을 때 마운드에 올랐다.
2008년에는 김성근 감독 부임 후 붙박이 마무리 투수로 활동했다.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여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7]
2009년에는 제2회 WBC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내주며 등판 기회가 적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중간 계투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팀 최다인 13홀드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시즌 초반 결장했으나, 5월에 복귀하여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롯데의 이대호를 상대로 3년 연속 무안타로 틀어막아 "'''이대호 킬러'''"로 불리게 되었다.
2011년에는 53경기에 등판해 3승 3패, 11홀드, 16세이브를 기록했다. 시즌 후 FA 자격을 획득, MLB 진출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협상했으나, 메디컬 테스트 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고 귀국했다.[8]
다음은 SK 와이번스 시절의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 년도 | 평균자책점(ERA) | 경기(G) | 승(W) | 패(L) | 세이브(SV) | 홀드(HD) | 완투(CG) | 완봉(ShO) | 이닝(IP) | 피안타(H) | 피홈런(HR) | 볼넷(BB) | 탈삼진(K) | 실점(R) | 자책점(ER) | |
|---|---|---|---|---|---|---|---|---|---|---|---|---|---|---|---|---|
| 2001 | 5.40 | 18 | 0 | 0 | 0 | 0 | 0 | 0 | 16.2 | 19 | 2 | 11 | 20 | 10 | 10 | |
| 2002 | 3.21 | 24 | 1 | 0 | 0 | 0 | 0 | 0 | 42.0 | 37 | 2 | 11 | 30 | 15 | 15 | |
| 2003 | 2.29 | 37 | 4 | 3 | 2 | 8 | 0 | 0 | 51.0 | 33 | 4 | 20 | 34 | 16 | 13 | |
| 2004 | 2.34 | 52 | 2 | 3 | 2 | 16 | 0 | 0 | 69.1 | 62 | 2 | 19 | 50 | 22 | 18 | |
| 2005 | 0.37 | 20 | 1 | 0 | 3 | 6 | 0 | 0 | 24.1 | 10 | 0 | 6 | 18 | 1 | 1 | |
| 2006 | 1.94 | 59 | 8 | 4 | 15 | 11 | 0 | 0 | 74.1 | 55 | 3 | 26 | 52 | 19 | 16 | |
| 2007 | 0.92 | 60 | 3 | 2 | 27 | 3 | 0 | 0 | 78.1 | 50 | 3 | 32 | 65 | 12 | 8 | |
| 2008 | 2.67 | 49 | 4 | 3 | 20 | 0 | 0 | 0 | 60.2 | 51 | 4 | 25 | 50 | 18 | 18 | |
| 2009 | 1.20 | 56 | 2 | 3 | 10 | 13 | 0 | 0 | 52.2 | 40 | 1 | 21 | 43 | 11 | 7 | |
| 2010 | 1.40 | 49 | 4 | 1 | 4 | 8 | 0 | 0 | 45.0 | 31 | 1 | 8 | 47 | 7 | 7 | |
| 2011 | 1.48 | 53 | 3 | 3 | 16 | 11 | 0 | 0 | 52.2 | 43 | 1 | 28 | 39 | 12 | 9 | |
| 합계 | 1.93 | 477 | 32 | 22 | 99 | 76 | 0 | 0 | 569.0 | 431 | 24 | 207 | 448 | 143 | 122 | |
2. 3. 롯데 자이언츠 시절
2011년 스토브 리그 때 당시 감독이었던 양승호가 투수진 보강을 위해 그의 영입을 타진했고, MLB 진출 포기를 전격 선언한 당일인 12월 13일 4년 간 총액 36억원(계약금 10억원, 연봉 5억원, 옵션 6억원)에 곧바로 FA 계약을 체결하고 이적했다.[9] 계약 후 그는 "미국에서 나름 힘들었는데 팀의 적극적인 공세로 마음이 움직였다"며 "꼭 이 팀의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 내 가치를 인정해 준 구단에 감사하고 열정적인 팬들이 있는 야구 도시 부산에서 뛸 수 있어 행복하다. 2012 시즌 팀 우승을 위해 큰 보탬이 되고 싶다"고 계약 소감을 밝혔다.[9] 그의 보상 선수로는 임훈이 선택되었다. 등번호는 SK 시절의 '''21'''번이 아닌 '''38'''번이었다.2012년 시즌 직전 무릎 부상이 재발해 수술을 받아 약 6개월간 재활했다.[10] 2012년 8월 9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적 후 첫 등판해 1이닝 동안 1탈삼진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렀다.[10] 당시 김사율이 마무리를 맡고 있어 셋업 및 중간 계투로 보직을 변경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2012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주로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고, 1승, 2세이브를 기록해 MVP로 뽑혔다. 그의 별명과 함께 SK 와이번스의 불펜 운용을 두고 나온 '벌떼 야구'와 당시 감독이었던 양승호의 성인 '양'을 결합해 양떼처럼 투수들이 몰려 나온다는 뜻으로 팀의 불펜 운용을 두고 '양떼 야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11]
2015년 오프 시즌인 10월 10일 제1회 WBSC 프리미어12의 한국 대표팀 선수 28명에 선발되었다.[2] 이 대회에서 준결승 일본전 9회 1점 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결승 미국전에도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2017년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3. 은퇴 이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동의대학교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2022년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불펜 투수코치를 맡았다.[3]
202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5일 1군 수석겸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4. 국가대표 경력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
- 2015 WBSC 프리미어12 국가대표
경희대학교 4학년 때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2000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4] 9월 20일 첫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타선의 난조로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5] 9월 26일 미국을 상대로 두 번째 선발 등판해 6.1이닝 3피안타, 2사사구, 6탈삼진, 2자책점을 기록했으나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6]
2008년 하계 올림픽 결승전에서는 0.2이닝 동안 1타자(유리스키 구리엘)를 상대해 유격수 땅볼을 유도, 병살타 처리하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7]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9년 3월 16일 본선 멕시코 전에서는 6회말 1사 상황에서 정현욱을 구원 등판하여 0.2이닝 1피안타 무실점, 2탈삼진으로 홀드를 기록했다.[8]
2015 WBSC 프리미어12에서는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출되어 본인의 9번째이자 마지막 국제 대회를 치렀다. 결승전에서 0.2이닝 1볼넷, 1탈삼진을 기록해 팀의 승리에 기여했고,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9]
1999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18.1이닝 동안 1승 1패, 평균자책점 1.47, 21탈삼진을 기록했다. 쿠바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팀의 4-3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IBAF 주최 국제 야구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쿠바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10]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9탈삼진을 기록하며 8.2이닝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11]
200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미국과의 두 경기에서 모두 선발 투수로 출전하여 로이 오스왈트와 맞대결을 펼쳤다. 리그전 첫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 준결승전에서 6.1이닝 2실점 5피안타 6탈삼진의 호투를 펼쳤다.[12]
| 년도 | 개최지 | 대회 | 팀 | 개인 기록 |
|---|---|---|---|---|
| 1999 | -- | 인터컨티넨탈컵 | 7위 | 1승 1패; 1.47 ERA (3경기, 18.1이닝, 3자책점, 21탈삼진) |
| 2000 | -- | 올림픽 | -- 동메달 | 0승 0패; 1.35 ERA (2경기, 13.1이닝, 2자책점, 11탈삼진) |
| 2002 | -- | 인터컨티넨탈컵 | -- 은메달 | 1승 1패, 2.18 ERA (3경기, 20.2이닝, 5자책, 24탈삼진) 탈삼진왕 |
| 2006 | --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 동메달 | 0승 0패, 5.40 ERA (3경기, 3.1이닝, 2자책, 6탈삼진) |
| 2007 | --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 은메달 | 0승 0패, 1세이브, 0.00 ERA (2경기, 1.2이닝, 0자책, 2탈삼진) |
| 2008 | -- | 올림픽 최종 예선 토너먼트 | -- 은메달 | 0승 0패, 1세이브, 0.00 ERA (2경기, 2.1이닝, 0자책, 2탈삼진) |
| 2008 | -- | 2008년 하계 올림픽 | -- 금메달 | 0승 0패, 2세이브, 2.25 ERA (3경기, 4.0이닝, 1자책, 7탈삼진) |
| 2009 | --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 은메달 | 0승 0패, 0.00 ERA (3경기, 1.2이닝, 0자책, 2탈삼진) |
| 2010 | --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승 0패, 0.00 ERA (2경기, 1.1이닝, 0자책) |
5. 플레이 스타일
정대현은 전형적인 언더핸드 투수로, 구속은 느리지만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두뇌 피칭을 선호한다.[7] 직구, 싱커, 커브를 던질 수 있으며 최고 구속은 137km/h, 평균 구속은 130km/h 초반이다.[7] 강력한 직구와 커브를 통해 타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좋은 날에는 커브의 비율이 좋고, 느린 커브와 각이 큰 커브를 모두 구사한다.[7] 구종이 다양하지 않아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변화무쌍한 투구를 보여준다. 직구는 싱커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다가 떨어지고, 커브는 오히려 떠오르는 등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는 두 가지 구질로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7] 낮게 오는 공은 제구까지 좋아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들며, 싱커볼은 낙차가 크고 예리하여 결정구로 활용한다.[7]
무릎 부상으로 인해 무릎 상태에 따라 팔 각도와 공의 회전수가 변하여 약간의 난조를 겪기도 했지만,[7] 2016년에는 안정된 피칭을 선보였다.[7]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구대성, 오승환과 함께 국가대표 마무리 투수 계보를 이었다.[7] 130km/h대의 직구와 싱커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언더핸드 투구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시드니 올림픽부터 2015 WBSC 프리미어12까지, 언더핸드 투구에 약한 미국이나 쿠바 등 중남미 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국가대표팀에 거의 빠짐없이 선발되었다.
SK 와이번스 불펜에서 '벌떼 야구'를 할 때 항상 마지막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기에 "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 에피소드
이대호와의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2007년 이후 3년간 이대호를 19타수 무안타로 막아냈다.[12][13] 그러나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기록이 깨졌다.[14]
2011년 11월 21일 MLB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도되었으나[1], 실제로는 정식 계약을 맺지 못하고 12월 13일 롯데 자이언츠와 4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그의 보상 선수로는 임훈이 선택되었다. 등번호는 SK 시절의 '''21'''번이 아닌 '''38'''번이었다.
2012년 2월, 일본에서 무릎 수술을 받아 4월 공식 경기 개막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8월, 롯데 이적 후 1군에 첫 등판했다. 같은 해 10월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마무리 투수로 기용되어 2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고, 준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했다.
2015년 오프 시즌인 10월 10일 제1회 WBSC 프리미어12의 한국 대표팀 선수 28명에 선발되었다.[2] 이 대회에서 준결승 일본전 9회 1점 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결승 미국전에도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2017년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군 등판이 없었고, 11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18년에 일본 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군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2019년부터 동의대학교 야구부 코치가 되었다.[3]
2024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5일 1군 수석겸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7. 별명
SK 와이번스 시절 '벌떼 마운드'의 핵심 선수라 하여 '여왕벌'이라고 불렸다.[15]
8. 출신 학교
9. 통산 기록
정대현의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KBO 리그 통산 기록
| 년도 | 팀 | 평균자책점 | 경기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완투 | 완봉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
| 2001 | SK | 5.40 | 18 | 0 | 0 | 0 | 0 | 0 | 0 | 16.2 | 19 | 2 | 11 | 20 | 10 | 10 |
| 2002 | 3.21 | 24 | 1 | 0 | 0 | 0 | 0 | 0 | 42.0 | 37 | 2 | 11 | 30 | 15 | 15 | |
| 2003 | 2.29 | 37 | 4 | 3 | 2 | 8 | 0 | 0 | 51.0 | 33 | 4 | 20 | 34 | 16 | 13 | |
| 2004 | 2.34 | 52 | 2 | 3 | 2 | 16 | 0 | 0 | 69.1 | 62 | 2 | 19 | 50 | 22 | 18 | |
| 2005 | 0.37 | 20 | 1 | 0 | 3 | 6 | 0 | 0 | 24.1 | 10 | 0 | 6 | 18 | 1 | 1 | |
| 2006 | 1.94 | 59 | 8 | 4 | 15 | 11 | 0 | 0 | 74.1 | 55 | 3 | 26 | 52 | 19 | 16 | |
| 2007 | 0.92 | 60 | 3 | 2 | 27 | 3 | 0 | 0 | 78.1 | 50 | 3 | 32 | 65 | 12 | 8 | |
| 2008 | 2.67 | 49 | 4 | 3 | 20 | 0 | 0 | 0 | 60.2 | 51 | 4 | 25 | 50 | 18 | 18 | |
| 2009 | 1.20 | 56 | 2 | 3 | 10 | 13 | 0 | 0 | 52.2 | 40 | 1 | 21 | 43 | 11 | 7 | |
| 2010 | 1.40 | 49 | 4 | 1 | 4 | 8 | 0 | 0 | 45.0 | 31 | 1 | 8 | 47 | 7 | 7 | |
| 2011 | 1.48 | 53 | 3 | 3 | 16 | 11 | 0 | 0 | 52.2 | 43 | 1 | 28 | 39 | 12 | 9 | |
| 2012 | 롯데 | 0.64 | 24 | 2 | 0 | 1 | 5 | 0 | 0 | 28.1 | 12 | 0 | 7 | 26 | 2 | 2 |
| 2013 | 3.33 | 58 | 5 | 4 | 1 | 16 | 0 | 0 | 51.1 | 56 | 3 | 21 | 34 | 21 | 19 | |
| 2014 | 4.07 | 60 | 4 | 2 | 2 | 13 | 0 | 0 | 42.0 | 40 | 2 | 13 | 27 | 19 | 19 | |
| 2015 | 2.95 | 19 | 2 | 1 | 3 | 3 | 0 | 0 | 18.1 | 16 | 3 | 7 | 17 | 6 | 6 | |
| 2016 | 5.19 | 24 | 1 | 0 | 0 | 8 | 0 | 0 | 17.1 | 24 | 3 | 13 | 7 | 10 | 10 | |
| 2017 | 1군 등판 기록 없음 | |||||||||||||||
| 합계 | 2.21 | 662 | 46 | 29 | 106 | 121 | 0 | 0 | 726.1 | 579 | 35 | 236 | 559 | 201 | 178 | |
### 국제 대회 기록
| 년도 | 개최지 | 대회 | 팀 | 개인 기록 |
|---|---|---|---|---|
| 1999 | 인터컨티넨탈컵 | 7위 | 1승 1패; 1.47 ERA (3경기, 18.1ml, 3자책점, 21탈삼진) | |
| 2000 | 올림픽 | Image:Bronze medal icon.svg | 0승 0패; 1.35 ERA (2경기, 13.1ml, 2자책점, 11탈삼진) | |
| 2002 | 인터컨티넨탈컵 | Image:Silver medal icon.svg | 1승 1패, 2.18 ERA (3경기, 20.2ml, 5자책, 24탈삼진) 탈삼진왕 | |
| 2006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Image:Bronze medal icon.svg | 0승 0패, 5.40 ERA (3경기, 3.1ml, 2자책, 6탈삼진) | |
| 2007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Image:Silver medal icon.svg | 0승 0패, 1세이브, 0.00 ERA (2경기, 1.2ml, 0자책, 2탈삼진) | |
| 2008 | 올림픽 최종 예선 토너먼트 | Image:Silver medal icon.svg | 0승 0패, 1세이브, 0.00 ERA (2경기, 2.1ml, 0자책, 2탈삼진) | |
| 2008 | 2008년 하계 올림픽 | Image:Gold medal icon.svg | 0승 0패, 2세이브, 2.25 ERA (3경기, , 1자책, 7탈삼진) | |
| 2009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Image:Silver medal icon.svg | 0승 0패, 0.00 ERA (3경기, 1.2ml, 0자책, 2탈삼진) | |
| 2010 | 아시안 게임 | Image:Gold medal icon.svg | 1승 0패, 0.00 ERA (2경기, 1.1ml, 0자책) | |
9. 1. 투구 기록
도
속
지
션
이
리
전
률
자
책
장
발
투
봉
이
브
드
닝
안
타
홈
런
넷
4
삼
진
맞
크
투
점
책
자
수
H
I
P
마무리 투수
